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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우연히 읽은 미군 폭격 후기들

by 찍고 읽고 걷다. 2022.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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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갑자기 내가 읽던 책들에서, 내가 보는 유튜브에서 

 미군의 폭격에 대한  이야기들이 동시에 나오기 시작했다. 

북한 


625전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던 중에 북한지역에서 이루어진
UN군과 미군의 폭격에 대한 이야기가 짧게 소개됐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당시의 미군과 UN군의 화력은 정말로 
막강해서 당시에 북한지역에 멀쩡한 건물이 단 한채도 남아있지 않을정도로 
많은 폭격을 쏟아부었다고 했다. 
그래서 당시의 북한주민들은 베트남전때의 북베트남(?) 사람들 처럼
지하갱도에서 집과 공장 가게를 지어서 살아갔었다고 한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초래된 1.4 후퇴때 북한주민의 대부분이 남한측의 군인들과 
함께 남하한데에는 미군과 UN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군대에서 사용되는 얼차려 용어중에서 '원산폭격'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도 625때 미군이 실시한 폭격에서 유래된 단어라고 합니다. 

그당시 원산은 북한에서 공업쪽으로나 교통쪽으로 중요한 도시였고 

이 점을 파악한 미군은 원산을 쑥대밭으로 만들정도로 어마어마한 포탄은 쏟아부었고 

이 내용이 남한측에 자세히 소개되면서 '원산폭격' 이라는말이 지금처럼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유럽 (아니 에르노)

 
최근에 좋아하게된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아무래도 하루키에게는 주지 않을 생각인것 같다... )
그래서 수상기념으로 아니 에르노의  또 다른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한 여자’ 라는 작품이다. (그녀의 어머니를 뜻한다) 
아니에르노의 가족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의 작품에서 독일군에 대한 이야기나 독일군에게 받은 횡포 핍박등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연합군측에서 이루어진 폭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니 에르노의 부모님은 노르망디에서 피난을 가지않고 그대로 생활했었다고 한다.)
연합군의 폭격은 꽤 규칙적으로 이루어졌었고 
폭격과 폭격사이에 아기였던 아니 에르노를 유모차에 태워서 산책까지 다녔었다고 한다. 
인간의 적응력은 정말 무서울정도로 엄청나다. 

 


일본(다자이 오사무)


지금은 다자이 오사무의 수필집 ‘다자이 다자이’를 읽고 있다. 
주로 그의 비루했던 30대 시절에 대한 이야기와 어린시절에 대한 글이 많은데 
도쿄 대공습 시절의 이야기도 들어가있었다. 
2차 세계대전 말 미군은 처음에 실시했던 고폭탄이 별로 효과가 없자 
위험을 무릅쓰고 폭격기를 저고도로 비행하면서 네이팜탄은 쏟아 부었다. 
주로 목조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던 도쿄는 핵폭탄을 맞은 히로시마나 나가사키보다도 
피해가 더 심했었다고 한다. 
도쿄 전체가 엄청난 열기에 휩싸였고 곳곳에서 온도차로 인한 회오리 바람도 일었다. 
이 바람은 왠만한 태풍보다도 더 강해서 부모님손을 잡고 함께 대피하던 
어린아이들은 순식간에 끌어당겨서 집어삼켰었다고 한다. 
불길이 옷에 옮겨 붙은 사람들은 가까운 하천으로 뛰어들었는데 
하천도 이미 펄펄끓고 있어서 그대로 삶아져서 죽어버렸다. 

당시 다자이의 가족도 매우 비참하게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작은 아들은 2살이었고 큰딸은 5살이었는데 눈병이 심하게 나서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공습을 대비해서 식량과 살림살이등은 땅에다가 파묻거나 우물물에 던져두고 
두꺼운 이불만 한장을 챙겨서 아이들을 데리고 폭격을 피해 도망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폭격이 머리위로 쏟아지면 밭으로 뛰어들어서 온가족이 함께 이불을 덮어쓰고 
피해있었다. 

한차례의 폭격이 끝난후 다자이의 집도 완전히 전소했고 
5살난 딸아이는 학교의 임시병원에서 눈을 치료받고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앞을 볼 수 있게된 딸아이는 불에다탄 집을 보고도 미소를 지으며 좋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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